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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왕조와 신앙

by 만사참견 2025. 4. 7.

출처: 나무위기, 위키피디아
 
 
피라미드 -> 왕가의 계곡
 
이러한 피라미드는 한동안 무덤으로 쓰인 모양이지만, 5, 6왕조 시기로 넘어오면서 재정 악화나 다른 건축물의 건축 증가 등으로 인해 규모는 4왕조 시기보다 축소되었고, 건축 기법 또한 큰 돌만을 이용해 쌓는 방식에서 내부를 작은 돌로 채우고 바깥쪽에만 큰 돌을 쓰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런 구조는 큰 돌만 사용한 피라미드보다 붕괴에 취약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다수 남아있는 5, 6왕조 시기의 피라미드는 기자의 피라미드에 비하면 돌무더기처럼 보일 정도로 보존상태가 상대적으로 좋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피라미드 건축방식의 변화와 반대로 장제전 등의 부속시설은 이 시기에 들어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내부 역시 벽에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던 이전 시기와 달리, 문구를 새기거나 벽화, 부조를 이용한 장식을 하는 변화가 나타난다.

6왕조 직후 고왕국이 멸망하면서(이집트 제1중간기) '귀족의 자식이 노예가 되고 노예의 자식이 귀족이 되는 세상'이라는 당대의 기록을 볼 때 엄청난 사회혼란이 있었던 듯하다. 당시 기준으로 고대 이집트 5천 년 역사상 최악의 가뭄이 닥쳐 어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아이들을 구워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역병과 정치적 혼란은 덤. 이집트는 근 2백 년간 혼란에 휩싸였다.[20]

이 때문에 피라미드같이 복잡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축조할 수가 없었고 심지어 기존의 피라미드를 훼손하기까지 했다. 결국 중왕국 시대에 이르면 단단한 석재 대신 진흙 벽돌로 속을 채우고 외벽은 포장용 석회암으로 만든 콘크리트로 마감한 피라미드를 만들기도 했지만 그나마도 안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내부 자재가 부실하고 포장용 석회 가루로 만든 콘크리트도 기술적 한계로 인해 외벽의 일부가 파괴되어 침식되면서 내부 벽에서는 물이 흐르는 일까지 발생해서 오늘날 남은 모든 중왕국시대 피라미드들은 붕괴위기의 콘크리트 덩어리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상태가 나쁘다. 그나마도 중왕국 후기에 이르면 힉소스인의 침입으로 인해 피라미드를 만들 시간도 없어서 그냥 바위산에 굴을 파고 매장했다.
 
12왕조시대 파라오 아메넴헤트 3세(Amenemhat III)의 벽돌 피라미드. 기자의 대 피라미드와 비교하면 이게 더 옛날 피라미드로 보일 만큼 상태가 나쁘며 현재는 붕괴 우려까지 나온 상태다. 아마넴헤트 3세의 생존년도를 토대로 계산해보면 저 벽돌 피라미드는 기자의 대 피라미드들보다 적어도 800~900년 뒤에 건축된 구조물이다.이집트인들에게 초고대 문명이란 과거의 자신들입니다!

이집트가 다시 국력을 회복한 신왕국 시대에 와서는 지난 세월의 환란 속에 피라미드 건축법을 이미 유실한 상태인데다가 정치적, 종교적 상황도 변화하였고, 수도를 고왕국 시대의 북부 이집트 멤피스에서 남부 이집트 룩소르로 옮기면서 최고신도 태양신 에서 창조신 아문으로 바뀌게 되는 등, 피라미드를 건축할 이유도 사라졌기 때문에 왕의 시신은 주로 왕가의 계곡이라는 곳에 매장했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도 피라미드가 아닌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왕가의 계곡은 오랜 세월 비밀이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발견됐는데 대부분 도굴당한 상태였다고 한다. 해당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겠지만, 예부터 쓰였던 무덤 마스타바와 피라미드는 눈에 띄어도 너무 띈다. 그래서 수백~수천 년간 도굴꾼에게 시달렸다.

그래서 아예 사막 속 암반 계곡에 굴을 파고 거기에 왕족의 미라와 부장품들을 안장한 것. 왕족들 입장에서는 잊힌 기술인 피라미드 건축법을 재건하기 위해 막대한 지출을 할 이유가 없었을 뿐 아니라 도굴로부터 그나마 더 안전한 사후세계가 보장된 새로운 장례지 선정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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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변화가 고왕국 시대까지는 라가 가장 중요한 신이었던 듯하지만 중왕국 시대에 아몬이 대두되면서[4] 라와 합쳐져서[5] '아몬 라'가 되어 주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에는 이시스가 인기를 얻으면서 신화에서 이시스의 비중이 높아지고 이시스가 라로부터 주신의 자리를 이어받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 등이 있다. 어떻게든 라가 연관되므로 라가 여전히 중요한 신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수천 년에 걸쳐서 중요신은 계속해서 변화했다.

세트도 신이지만 이시스 및 호루스와 대립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시스 신앙이 강해진 말기에는 거의 악마 비슷하게 취급되기에 세트의 이름을 딴 파라오가 나오는 시기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세트가 호루스에게 목이 잘리는 것으로 묘사되는 신전도 있다. 이집트의 창세신화 역시 도시마다 기록이 다르다.

사제들의 권한은 매우 막강했고 권력을 장악하는 사제 집단에 따라 신화의 내용이 변경되거나 혹은 해당 집단이 믿는 신이 강조되는 등 신화의 큰 틀이 변화하진 않더라도 소소한 변화가 많았다. 이런 사제들에 대항하려는듯 신왕국 18왕조의 아케나텐은 왕권 강화를 위해 다른 신들을 부정하고 오직 아텐만을 믿는 일신교 종교개혁을 벌어기도 했으나 일반 민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그가 죽은 이후 다시 원래의 다신교가 부활할 정도로 절대적이였다.

하지만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유일신교인 그리스도교가 대두되면서 박해를 받아 소멸되었다. 537년에 고대 이집트 종교의 최후 보루였던 아스완의 필라에 신전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령에 따라 공식적으로 폐쇄되어 관짝에 대못이 박히고 말았다.[6]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신이교주의자들이 복원하여 믿기도 하는데[7] 케메티즘(Kemetism)이라고 한다. 케메트(Kemet)란 단어가 고대 이집트인들이 자신들의 나라(이집트)를 부르던 말로 '검은 땅'이란 뜻이다. 물론 현대 이집트에서도 학교에서 고대 이집트 신화에 대해 간략하게 가르치기는 하며, 현지 작가들이 종종 소재로 써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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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문

신들의 왕이자 바람의 신인 고대 이집트의 신. 아몬(Amon)이나 아멘(Amen)이라고도 읽는다.
 이름의 뜻은 '감추어진 자'로, 본래 공기의 신이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개구리 머리 또는 그냥 개구리로 표현되곤 했으나, 나중에 제대로 된 사람의 머리를 갖추게 되었다.
신왕조 말기가 되면 숫 머리를 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늘어나며, 아몬을 제우스와 동일시한 그리스인들에 의해 숫양 이미지가 지중해 세계에 널리 전파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신의 조각상에 숫양 뿔을 단 사례나 암모나이트의 명명 등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다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는 여전히 제우스-아몬 으로서 숭배되기는 하였으나,
아몬 신앙이 네일로스 삼각지대와 하 이집트에서는 그닥 강하지 않은데다가 동물 머리가 그리스인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와서
습합신 세라피스(그리스+이집트 종교 융합)  숭배가 장려되었다.

원래는 룩소르의 지방신 출신으로, 헤르모폴리스 신화에 등장하며 최초의 8신 중 한 명이다.
아몬은 아마우네트와 더불어 공기의 속성을 띄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징한다.
고왕국 시대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으나
룩소르를 수도로 삼은 신왕국이 융성하면서 아문을 최고신으로 삼으면서 아몬 신앙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주신이 되면서 수많은 파라오들의 노멘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아메넴하트(Amenemhat; 아멘 신 앞에 있는 자), 아멘호테프(Amenhetep; 아멘 신이 만족하는 자, 아멘이 기뻐한다) 등의 이름이 그것이며, 그 파라오의 저주로 유명한 투탕카멘(Tutankhamen; 아멘의 살아있는 형상)도 마찬가지다.
나중에는 태양신 와 결합해 '아문 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아문은 태양신이 아니며 사실상 별개의 신이다.
 
라의 경우 아문 뿐만이 아니라 호루스와도 결합하여 라-호라크티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대신전은 카르나크에 있다.
최초로 조성한 건 아메넴헤트 1세지만 그 뒤를 이은 수많은 파라오들이 미친 듯이 탑 문과 기둥, 그리고 오벨리스크를 경쟁하듯 지어 댔고,
현재는 10개가 넘는 탑 문부터 참로를 따라 늘어선 숫양 스핑크스, 대열주실을 가득 채운 수많은 거대한 기둥들, 하트셉수트 여왕의 것을 비롯한 오벨리스크들 등 중왕국 시대에서 신왕국 시대까지의 이집트 미술의 정수를 모아둔 곳이 되었다.
 
근처에 부인인 무트(Mut) 여신전과 아들인 달의 매 콘수 신전도 있다.
아문의 신전 인근에 염화암모늄이 많이 보였기 때문에 암모니아 관련 화합물은 이 아문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마케도니아 왕국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스스로 아문의 후예라고 칭했는데, 이 때문에 이집트의 주군을 신격화하던 이집트의 관례에 들어맞아 파라오로 추대됐다.

 

아마르나 혁명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아문-라의 숭배 절정기에는
아문-라 신전의 사제들이 가진 돈과 권력이 너무 강대해져 파라오를 위협하는 수준이 되었는데,
 
이 때문에 당시 파라오였던 아멘호테프는 아문-라 신앙과 모든 다신교 신들을 부정하고
 아톤을 유일신으로 삼는 유일신교를 창제한다.
이때 사제들의 입김이 많이 불던 룩소르에서 아마르나라는 신도시로 천도까지 하고 파라오 자신의 이름도 아크나톤으로 개명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너무나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데다 일반 백성들의 공감도 거의 못 얻어내어 최종적으론 실패한다.
아크나톤의 치세 동안에는 그래도 그럭저럭 굴러갔지만, 아크나톤이 죽자 다시 롤백.
아마르나는 버려지고 수도도 다시 룩소르로 돌아갔다.
아크나톤의 다음 파라오인 투탕카텐(아텐의 살아있는 상)은 결국 사제들의 압박하에
아크나톤이 했던 모든 개혁을 되돌리고 이름도 다시 투탕카멘(아멘의 살아있는 상)으로 바꿔야 했다.